지하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멍하니 눈을 뜨고 낯익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조금 더 그대로 누워있기로 했다.
뭘까... 그건...
꿈일까, 현실일까, 구분이 잘 되지 않아.
이건... 뭘까. 너무 생생해서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만 같은데, 그런데 절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지하는, 얼굴 근처가 약간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들어 볼을 쓸어내리니, 손에 흥건하게 물기가 묻어났다. 눈물일까? 난 왜 울었지?
지하는 손에 묻은 물기를 살살 비비면서 손을 바라보다, 한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손톱에, 까만색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다.
이건...
벌칙 중에 한가지였던, 매니큐어 바르기.
분명 그 때, 루미가 골라준 까만색 매니큐어를 발랐었다. 그럼 그 일들은 모두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걸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지하의 머릿속에 꿈이라고 생각했었던 모든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 난처한 얼굴의 루미가 앞에 서 있었다.
나가려면 여덟 가지의 벌칙 게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처음 보는 남자가 영상속에서 말을 걸었다.
마치 쏘우 같다고 혼자 생각했었던 기억도 난다.
바다에 간다는 번호를 뽑자, 갑자기 사방이 바다로 변했던 것도.
그 바다에서 같이 물에 발을 담그고, 루미가 자신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 그리고 자신은 루미의 손 끝에 키스하고.
노래를 불렀던 것도 기억난다.
그리고... 그리고....
루미의 말이 마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 귓전을 울렸다.
"패스해야지. 좋아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잖아, 이런 건?"
"사실 나는 이런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어서, 해도 상관 없고, 안 해도 상관 없어."
"어, 됐어. 됐네. 이제 세번 남았네."
사실은 키스한다는 벌칙이 걸릴 줄은 몰랐어.
사실은 키스하라고 했을 때 조금 기대했어.
사실은 두근거리고 설렜어. 그랬..었어...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이불에 점점이 물들었다.
놀라서 황급히 닦아냈지만 눈물은 점점 더 흘러넘쳐 결국 지하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렸다.
사실은, 좋아해요. 아니 그것보다도 더 큰 것 같아요. 아마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신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어.
내겐 당신과의 키스가 무척이나 큰 의미였는데, 당신에겐 단지 그 공간에서 나가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잖아요.
정말 아무 상관없다는 루미의 태도에 결국 '하...' 하고 자조적인 한숨을 뱉어냈던 일도 떠오른다.
그 곳에 가만히 서서, 눈을 감아줘요. 그렇게 말하고, 아려오는 가슴을 움켜쥐고 한발 한발 걸어서 루미 앞에 도착해선.
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조심스레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입술을 마주쳤던 그 순간.
그래도 기쁠 줄 알았는데. 아마 평생 닿지 못하지 않을까 싶던 입술에 닿아 행복할 줄 알았는데.
가슴 속 가득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만 남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던 그녀에게 그는 "이제 세번 남았네"라는 말을 뱉었다.
그 뒤로는 사실 기억이 흐릿하다. 단편적으로 부분부분 기억이 날 뿐...
메이드복을 입은 그가 결국 '패스'를 사용하자고 말했던 그 순간의 아픔.
아무것도 아닌 나와의 키스보다 그게 더 힘들었던 걸까...?
불꽃놀이를 보는 중에 손을 잡아오던 의미모를 그의 행동.
어차피 분위기에 휩쓸렸겠지 싶어 결국 마주 잡을 수 없었지만 차마 뿌리치지도 못했어.
예전에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어.
내가 강아지였어. 그러니까 분명 꿈이었지만, 그 꿈에서 그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지.
"사실은, 요즘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이름을 네게 붙여줄게. 지하라고 불러도 되겠니?"
그 꿈을 꾼 다음 날 아침, 그날따라 한 번 전화하지 않던 루미가 아침부터 전화해서 지하를 깨웠다.
잘 있는 지 궁금해서 연락했다며, 어제는 즐거웠다고 다음에 또 같이 가자고.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던 그가 연락해서 그런 말을 하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꿈이 길몽이었어- 하고 내내 행복해했었다.
하지만 그건 꿈이고 이건 현실이야.
그 꿈은 그냥 내 바람일 뿐이었어.
역시, 그에게 난 특별하지 않은 거야. 그냥 아는 사람인거야.
혼자여서 다행이다, 지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나마 억눌러왔던 울음을 무방비하게 풀어놓았다.
절망에 빠진 그녀의 비통한 울음이 작은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순간, 방 안에 기묘한 뒤틀림이 나타났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가 하염없이 우는 동안 그 뒤틀림은 점점 한 남자의 형태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남자의 형태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야, 이거야 원. 관심있게 보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즐겁게 해주다니. 이 나를 여기까지 불러낼 정도라니 대단해."
"?!!!!"
깜짝 놀라 울음을 그치고 뒷걸음질로 벽에 붙어버린 지하의 얼굴을 보며 그는 즐겁게 미소지었다.
그 얼굴은 벌칙 게임을 하라던 남자와 똑같아보였다. 그는 눈물로 범벅이 된 지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 관심을 받은 아이야. 너와 네 친구가 몇번 나를 즐겁게 해 주었지만 글쎄, 그래. 그건 가벼운 유흥거리였지.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다르네. 그 작은 가슴 속에 가득찬 절망이 내 흥미를 끄는 군.
그 절망은 어디까지 자라서 꽃을 피울까. 넌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는 얼어붙은 지하의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손가락을 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지하의 왼쪽 눈과 심장 근처를 톡, 톡 하고 두드리자, 마치 칼로 찌르는 것 같은 격통이 그 부위를 스쳐갔다.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이를 악문 지하의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하의 왼쪽 눈을 깊숙히 들여다보던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던 반짝임을 보자 만족한 미소를 띄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부디 발버둥쳐보렴. 그 운명에서 벗어나보렴. 나는 즐겁게 구경하고 있을테니."
그 말을 뱉자마자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침대에 털썩, 하고 쓰러져 정신을 잃은 지하를 내려다보다가-
그 남자는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나타났을 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