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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Story

누가 그 용의 눈을 멀게 했는가 (드래곤라자 AU)

드래곤라자 AU 소설입니다.
세계관 붕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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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누구세요?"

허름한 나무 문이 끼익 열리고 안에서 빨간 머리 처녀가 걸어나왔을 때, 루나는 이 계획이 성공할 것임을 직감했다.
처녀는 루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깊이 굽혔다.

"루나미스트님, 이런 곳까지 어인 일로.. 어서오세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루나를 보며 처녀는 잠시 볼을 붉혔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아니- 드래곤이라서 더더욱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기에
며칠 뒤 신방에 들 처녀가 조금쯤 두근거린다 해도 책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무슨 일이신가요. 록산느는 조금 전에 집으로 돌아갔어요."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수줍어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어려워하는 기색을 어렴풋이 느끼며 루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라자의 부인이 될 사람이니, 축하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둘이서 하고 싶은 얘기도 조금 있고.
괜찮다면, 들여보내주지 않겠나? 이 시간 아녀자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인간의 법도상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네만.
나는 일단 드래곤이고."

루나는 어깨를 으쓱한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명예를 위해 살짝 마법적인 조치를 취해 두었으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아무래도 이상한 소문이 나면 자네도, 내 소중한 라자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고.
내가 록산느를 매우 아낀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네.
혼인은 중대사, 이런 일을 앞두고 앞으로 그의 배우자가 될 자네에게 몇 가지 부탁하고 싶은 점이 있어.
드래곤과 라자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는 자네도 들어 알고 있겠지.
이해해 줄거라 믿네. 어떤가? 괜찮겠는가?"

마법이며 뭐며, 그런 쪽으로는 전혀 모르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시골 처녀였던 그녀는
눈 앞의 드래곤이 쏟아내는 말에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다가 급히 문 앞에서 비켜서 고개를 조아렸다.

"누추하지만, 부디 편하게 쉬다 가세요. 그이를 생각하시는 마음 어련하겠어요."

그런 그녀를 잠시 사느란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루나는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능하면 들어오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쪽이 모양새는 낫다.
집 안은 생각보다 더 비좁고 세간도 어지간히 없었지만, 처녀의 손 끝이 제법 야무진 탓인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루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한 켠에 놓인 탁자 앞에 앉으며 그 위에 술병을 올려놓았다.

"제법 좋은 술이네. 물론 혼인 때는 더 좋은 술로 따로 보낼 것이네만, 자네에게 따로 주고 싶어 챙겨왔지.
지금 한 잔 하겠는가? 여인들이 좋아할 만한 술로 골라왔으니 마시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네."

조심스레 루나를 따라 들어온 처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찌 루나미스트님과 함께 술을 마시겠어요- 그런 말씀 말아주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괜찮은가?
어차피 어느쪽이든 실례라 생각하면, 이왕이면 나랑 같이 한잔 해주게.
나도 오늘은 내 라자의 혼인이 얼마 남지 않아 조금 감성적이 된 것 같군."

재차 반복된 루나의 권유에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느 쪽이라도 폐를 끼치게 된다면 역시 드래곤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이 일로 부탁할 일도 있다 하셨고, 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면 술이 있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

밤 늦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방문해 술을 권유하는 드래곤을 보며 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어 그 생각을 털어냈다.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간단히 먹을 것을 준비해 오겠어요."

부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돌아보다, 루나는 시선을 눈 앞의 병으로 옮겼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에 최근 호사가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사과주가 그 병 안에 담겨 있었다.
물론, 그 병에 들어있는 것은 사과주 뿐은 아니었지만.
록산느는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까. 아무래도 충격은 좀 받겠지. 하지만 별 일 아닐 게다.
그는 내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이해해 줄 것이다. 그는 나고, 나는 그니까.
게다가, 나와 그 사이에 쌓인 시간은, 추억은 꽤 두터우니까.

잠깐 사이에 다시 돌아온 그녀는 소박한 컵 두 개와 소량의 과일을 탁자 위에 내왔다.
루나는 마지막 관용을 베풀어 손수 술병을 개봉하고 잔에 아름다운 황금색의 액체를 찰랑찰랑하게 따랐다.
그리고 그녀가 앞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술잔을 하나 그녀 앞에 내려놓고, 다른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대와 록산느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위대한 드래곤이기에 그깟 첨가물에 흔들릴 일은 없었지만, 루나는 그 순간을 똑똑히 두 눈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올리고 고개를 돌려 한 모금, 두 모금 술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을 술잔에 입만 댄 채 주시했다.

-툭

술잔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황금색 액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루나를 바라보면서 두 손을 들어올려 입을 막은 그녀는 금세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를 줄줄 흘려내기 시작했다.

"쿨럭!"

치밀어오르는 핏물을 계속 억누르다가 결국 참지 못해 쏟아낸 기침에 핏방울이 여기저기 튀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눈 앞에 배리어를 펼친 루나에게는 한 방울도 가 닿지 못했다.
루나는 냉엄한 눈으로 테이블 위에 무너져내리는 그녀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바라보았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그녀의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더 황홀했다.

루나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술잔에 든 술을 느긋하게 입으로 넘겼다.
방해는 사라졌다. 그는 내 것이니까. 내 일부니까. 허락없이 내 것에 손을 댄 자는 이 세상에 발 붙일 자격이 없지.
이젠 어디로 가볼까. 몇년이고 노래를 부르며 이곳저곳을 여행했는데, 아직 둘이서 갈 곳이 산더미인데.
정착하고 싶다고 수줍게 웃던 록산느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루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널 얽매던 족쇄를 풀어줬으니, 넌 나에게 고마워하겠지.
나는 영원의 시간을 살아간다고도 일컬어지는 드래곤. 네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고마워하는 걸 기다리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다음엔 오랫만에 함께 사막으로 돌아가볼까. 너를 만나고 한참동안 내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물방울을 세어가듯 술을 입안에서 굴리며 매우 천천히 목으로 넘겼음에도 어느새 커다란 술병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창 밖에서 빛이 선명하게 새어들어오는 것을 보니, 아침 해가 얼굴을 보인 것 같다.
빈 술잔을 보며 루나가 쯔쯔, 혀를 찬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앞에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의 록산느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루나.. 도대체 무슨..짓을..."
"록산느, 왔군."

록산느는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는 루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시야를 그 맞은편으로 옮겼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때리는 와중에도, 그럴 리 없어- 그 분이 그럴 리 없어- 하고 되뇌이며 문을 열었는데.
테이블에 퍼져 있는 거무죽죽한 붉은 색의 액체와, 그 위에 너무도 선명하게 흩어져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붉은 머리칼을 보고
록산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록산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고개를 들이민 루나와 눈이 마주치자, 록산느는 순간 그를 세게 밀쳐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살짝 화가 난 드래곤의 감정이 그대로 자신에게 쏟아져 들어왔지만, 록산느는 그 감정을 무시하고 굳어버린 팔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여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에리나... 에리나?"

일말의 기대를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예상대로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오지 않았다.
조심스레 뻗은 손 끝이 테이블 위에 힘없이 놓인 그녀의 손에 닿아 전해진 얼음장처럼 차디찬 감촉에 록산느는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분노와 괴로움에 가득찬 록산느의 시선에 루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는 한번도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항상 어쩔 수 없네요, 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에게 많은 걸 내어주곤 했다.
당연했다. 그는 내 라자니까, 내 일부니까.
항상 인간을 지나가는 사슴이나 날아가는 나비처럼 생각했던 루나는, 이 순간 록산느의 표정을 보며 엄마 잃은 아이처럼 갈 곳을 잃었다.
어째서 내게 이러는 거지? 난 내 것을 현혹하는 미물을 없애고 내 것을 되찾았을 뿐이다. 당연히 상실감은 있겠지만, 금방 괜찮아질 테지.
그런데 왜 너는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내가 네 옆에 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한다. 어째서 너는 그런 나를 그런 얼굴로 쳐다보는 거지?

그리고 그런 어린아이같은 마음조차 전부 받아들여버린 록산느는 인간과 드래곤의 괴리에 깊이 절망하고 말았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만날 생각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녀의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선명하게 흘러나오는 익숙한 이의 감정에 등골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 분이 어째서... 이 곳에? 그보다 이 감정은, 설마... 설마!!!'

다급하게 문을 열었을 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참상은 그의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무너진 세상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서 있던 드래곤은 이런 일을 저질렀음에도 아무 죄책감없이 평소와 같은 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그의 분노에 당황해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다.
록산느의 호박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드럽고도 강한 그는 루나와의 험한 여정에서도 한 번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아스라한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던 그였다.

록산느는 루나였고, 루나는 록산느였다.
루나는 세상 어느 존재보다 록산느가 소중했다. 그도 그럴 게, 록산느는 그 자신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물질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 그리고 점점 록산느의 시간을 빼앗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빨리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록산느도 당연히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다. 소중한 장난감을 빼앗기는 일 따위 내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고통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록산느에게는 그녀가 그 자신보다, 그리고 루나보다 더 무겁고 소중했다.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알아낸 루나는 그럼에도 록산느가 그 방황을 금방 끝낼 것이라고 믿었다.
루나는 똑바로 바닥을 딛고 서, 가볍게 옷을 정돈한 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록산느에게 말했다.

"내가 지내던 그 여관에서 기다리겠다. 얼마가 걸려도 되니 마음 정리를 하고 돌아와라. 우리에겐 아직 가보아야 할 곳이 많으니."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당황을 몇백년의 경험으로 가볍게 내리누르며, 그는 그대로 뒤돌아 그 자그마한 집을 떠났다.


일주일 가량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록산느는 루나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왔다.
루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기실, 록산느가 루나의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찾아오기도 했다.
열흘이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드래곤에게는 크게 의미 없는 시간.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렸다 해도 루나는 그대로 그 곳에서 기다렸을테다.
그의 라자가 다시 그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은 어떤 법칙보다도 확고하게 루나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록산느가 다시 그의 앞으로 돌아와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였을 때, 루나는 태연하게 어서오라며 이번엔 사막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건넸다.
그가 조금 더 예민했다면 록산느의 미소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었겠지만, 위대한 드래곤은 한낱 인간의 표정 변화에 그다지 민감하지 못했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너와 세상을 유람하면서 집을 꽤 비웠다. 한번쯤은 돌아가는 것도 좋겠지. 우리가 만난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막. 황량한 공간. 그렇군요. 딱 좋습니다. 지금 당장 가도록 할까요."

버스럭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건넨 록산느의 대답을 듣고, 루나는 만족스러워하며 록산느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그대로 사람의 기척이 뜸한 인근의 숲 속에 이동한 뒤, 폴리모프를 해제한 루나는 록산느를 태우고 빠르게 자신의 레어로 돌아갔다.
록산느에게는 해로울 희박하고 차가운 공기와 몸을 에이는 바람을 막아주려 루나가 펼친 배리어는 평소와 다름없이 포근했다.
확고한 애정에 근거한 세심한 배려. 루나는 그런 것을 할 수도 있는 드래곤이다. 단지 그것이 자신과 다름없는 라자에게만 발휘될 뿐.
그 편협한 사랑에 한없이 끌리는 자신이 있다. 록산느는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 감정과는 별개로 자신의 속에 도사린 어둡고 질척한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가라앉기는 커녕 몸뚱아리를 불려가고 있었다.

발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던 초록의 풍경도 어느새 점점 옅어지고 끝없는 황토색 대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루나는 익숙한 풍경을 발견하고 점점 고도를 낮추며 속력을 줄여, 이윽고 대지에 몸을 내렸다.

"이런 말 하는 것도 그렇지만, 참 오랜만인 것 같군."
"...그렇습니까."
"너와 만나고 꽤 다양한 경험을 했으니까. 어쩌면 내가 너를 만나기 전에 살아온 시간동안 경험한 일보다, 너를 만나고 나서 경험한 일들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구나. 그래서 그 찰나의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걸까. 사랑하는 내 라자여."
"그렇게 저를 아끼십니까."
"너는 알지 않느냐, 내가 너를 어찌 생각하는 지. 불공평한 관계이나, 이럴 땐 참 편리하게도 느껴지는 군."

애정 가득한 눈으로 온화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루나. 당연하게도 그 감정 또한 록산느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 당신이 사랑스럽고도 증오스럽다.
이것이, 당신에게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다.
부디- 내가 흘린 눈물의 편린이라도 당신에게 가 닿길.
내가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잃고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당신도 알아차릴 수 있기를.
당신의 다음 라자는, 만약 그런 존재가 생긴다면- 조금 더 좋은 관계를 당신과 쌓아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했고, 행복했지만. 우리의 끝은 파멸이구나.
...이것으로 에리나의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루나.

드래곤과 라자, 불공평한 관계.
라자는 드래곤이 어째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한순간에 모두 깨달아버렸지만
드래곤은 자신의 라자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지, 티끌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해고 즐거움에 빠져 웃었다.
그래서 루나가 상황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날카롭게 빛나는 단도가 록산느의 가슴을 뚫고 심장에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록산느?"

힘없이 무릎을 꿇는 록산느를, 루나는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록산느의 마지막 고동이 루나의 머릿속에서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두근, 두근... 두근......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록산느의 주변으로 시뻘건 핏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색 옅은 금발머리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고통스러웠을 자해에도 눈을 감은 그의 옆얼굴은 매우 평화로워서- 지옥같은 풍경속에서도 한없이 아름다웠다.

"아냐... 아니지... 록산느...?"

그대로 무너져내린 루나는 무릎걸음으로 록산느에게 다가갔다. 핏물이 손에 묻고 옷을 적셔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흔들었다.

"눈을 떠, 록산느. 이게 무슨 장난이지? 나를 놀리려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록산느는 그대로 핏물에 잠겨,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던 고동은 점차 느려지고 작아지기 시작했다.
죽는 건가...? 내 라자가? 어째서? 죽...어? 그가? 내가?
내가... 죽어?

루나의 머릿속에서 연약하게 이어지던 고동이 결국 뚝 끊기고 말았다.
순간, 황량한 사막 가득 블루 드래곤의 고통에 찬 포효가 울려퍼졌다.
온 사방에 새파란 뇌전이 가득 차올랐다. 몇 없는 식물이 타오르고 말라붙은 사막의 모래와 바람까지 파지직거리며 휩쓸려올라가는 그 지옥도의 한가운데에서 록산느는 여전히 홀로 평화로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사방에서 내려꽂힌 벼락에 사막이 활활 불타던 날들.
죽을 때까지 상냥했던 록산느의 배려로, 고통에 미쳐버린 드래곤이 몇 달을 날뛰어도 메마른 사막에서 휘말려 죽은 사람은 다행히 나오지 않았다. 또한 그래서, 한없이 뿜어나오는 마력마저 고갈시킬 정도로 사방에 벼락을 뿜어내고 끊임없이 모래에 몸을 부딪히던 드래곤이 간신히 몸을 추슬러 레어로 돌아가며 떨군 수많은 눈물방울을 본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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