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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Story

[BL] 천식 1

지병이란 참 귀찮은 것이다. 차라리 확 아프고 말지, 은은하게 삶에 들러붙어서는 잊을 만 할 때면 굳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나 여기 있소 외치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이전처럼 마구 움직였다 툭 튀어나온 병에 걸려 넘어질 때면 윤우는 조용히 속으로 욕설을 퍼붓곤 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천식 발작에 응급실로 호송되어 간신히 한숨 돌린 윤우는 병명을 듣고서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대체 왜 갑자기 없던 병이 생겼나. 의사선생님께 억울하다 토로했더니, 돌아온 질문이 가슴을 쿡 찔렀다. 알러지 비염 있으시죠? 그거나 이거나예요. 가능성은 계속 있었던 거예요. 아니 그럼 갑자기 생겼으니까 갑자기 없어질 수도 있잖아요? 하도 억울해 조금 따져본 윤우에게 의사는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글쎄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 일단 약이나 잘 드세요.

커밍아웃한 뒤로 가족과도 연을 끊었고, 몇 번 이어진 연애마다 가슴에 생채기만 가득 남기고 끝나버려 이를 악물고 이 생은 나 혼자 산다- 선포한 몸이니 제 몸은 제가 빠릿빠릿 챙겨야 했다. 덜렁대는 성격에 몇 번 인헤일러(* 흡입하는 약)를 까먹고 바깥에 나갔다가 예기치 않은 발작을 겪고 고생을 하고 나선 두 종류의 인헤일러를 꼼꼼히 챙겨다녔다. 아마도 별 일 없으면, 평생 약을 끼고 다녀야겠거니 생각하며.

그런 살얼음판인데도 겉으로는 평온했던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순전히 백프로 타의로 인해.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고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연락한 대학 친구를 만나러 간 자리였다. 혼자 나오는 줄 알았더만 친구 옆에 길쭉한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어 살짝 멈칫하자 상대가 슬쩍 일어나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형."

"아 윤우야, 미리 말 못해서 미안. 오늘 너 만나러 나간다고 했더니 은호가 부득부득 같이 오겠다고 해서 말야."

멋쩍은 듯 양해를 구하는 친구한테 괜찮다고 답하며 자리에 앉아 찬찬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 은탁은 윤우와 성격도 잘 맞고 관심사도 비슷해 급속도로 친해졌다. 윤우의 성적 지향을 아는 몇 없는 대학 친구기도 했다. 워낙 배려심 깊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친구여서 대학 다니는 내내 둘은 자주 만나 어울렸다.

어느 여름학기, 자취방에 남아 알바도 하고 그림도 그리다가 심심해서 놀러간 은탁의 자취방에 그 아이가 있었다. 여름방학동안 잠시 형이랑 같이 살기로 했다며 꾸벅 인사하던 그 아이는 그때만 해도 참 앳되었다. 체육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는 애 답지 않게 뽀얀 살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던 아이였다. 중학생 꼬마 데리고 살기 힘들지 않겠냐 물으니, '꼬마'는 대번 자존심 팍 상한 듯 이마를 찌푸렸고 은탁은 그런 동생을 보며 웃었다. 쟤가 저렇게 귀여워서 제법 살 맛 난다고. 노려보는 눈빛에 뒤늦게서야 보기보다 어른스럽고 자기 앞가림 잘 해서 사실 손이 거의 가지 않는다 웃으며 덧붙였더랬다.

그 여름, 은탁이 저를 자취방으로 부르는 빈도가 평소보다 더 잦아졌었다. 손 안 간다며, 나보고 중딩 꼬꼬마랑 놀아주라는 소리 아냐? 하고 볼멘 소리 반 농담 반 섞어 던졌더니 돌아오는 소리가, 은호가 니가 맘에 든단다라서 좀 웃었던 기억이 났다. 뭐 늘상 치고박는 형보다야 와서 웃어주고 놀아주는 형이 더 좋겠지. 그래 알았다 하고 보드게임이며 뭐며 들고 가 신나게 놀아주고 오곤 했다. 사실 저도 심심했거니와, 콕 찝어 저랑 놀고 싶다고 부른 주제에 마주 앉아 있으면 말도 잘 안하며 질문에 단답형 대답만 내뱉다가 게임만 시작하면 승부욕이 드글드글한 눈으로 달려드는 중딩이 꽤 귀엽기도 했더랬다. 얘보단 두어 살 더 먹었지만 제 동생도 이만치 귀여웠는데, 그 동생은 대학 입학하면서 집안에 내지른 커밍아웃에 제 머리카락 한 가닥도 보기 싫다 하니.

"이야, 그 은호가 이렇게 컸어?"

"몇 년이 지났는데 안 컸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쿡쿡거리며 웃는 제 형 옆에서 말없이 술잔이나 기울이는 게 성격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키는 쑤욱 커서 볼살이 싹 빠져 성인 남성의 윤곽이 확 드러나니, 길 가다 마주쳐도 못 알아볼 것 같아 윤우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야, 우리 그렇게 늙었냐...?"

"뭐라냐 아직 살 날이 구만리인데."

얘가 좀 무섭게 자라긴 했지, 예전엔 귀여운 인형 같았는데 요즘은 화내면 바지에 지릴 것 같다니까. 익살을 떠는 제 형의 손목을 잡으며 형, 나즈막히 부르는 목소리에 제법 냉기가 서려 윤우는 과연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반갑다. 몇 년 만이야 이게."

"7년이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해오는 은호의 시선이 곧게 저를 향해 있어 윤우는 조금 움찔했다. 나는 그게 어느 여름날인지도 가물한데 쟤는 햇수까지 정확히 기억하네. 젊은 게 좋긴 좋나.

그 날의 술자리는 꽤 즐거웠다. 제가 졸라서 나왔으면서 말도 잘 안하고 조용히 술만 홀짝이던 은호는 너무 오랫만이라 낯을 가렸었는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입을 제법 열기 시작했고, 은탁과는 항상 단둘이 만났었는데 한 명이 더 참전하니 자리가 왁자지껄 달아올라 윤우는 평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다. 평소같으면 적당히 주량 봐서 끊어주었을 은탁도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정신을 팔아, 깨닫고 보니 윤우는 술집 의자에 늘어져 뜨거운 숨만 훅훅 뱉고 있었다. 약간 멀어진 주변 소리 사이로 가벼운 말다툼이 들리고, 누군가 '제발-'이라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앗 하는 사이 윤우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도로로 걸어나와 택시에 탔다. 취해도 귀소본능은 그대로 발휘돼, 집 주소를 줄줄 읊고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저를 추슬러주는 손길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어깨에 고개를 얹으며 잠든 윤우의 귓가에 후우, 작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으음...."

아 목말라... 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끙끙거리니 어느새 손아귀에 시원한 컵이 들어왔다. 그게 무척 반가워서 생명수마냥 단숨에 들이키고 나니 그제야 숨이 트여 윤우는 뻑뻑한 눈꺼풀을 꾸물꾸물 밀어올렸다. 분명 낯익은 제 방인데, 그럼 방금 물 떠다 준 사람은 누구? 하며 갸웃거리고 있자니 새로 채운 물컵을 든 은호가 침실로 들어왔다.

"좀 괜찮아요?"

"아, 어어.... 니가 데려다준거야?"

"네."

"미안하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좀 과음했네. 우리 집은 어떻게 찾았어?"

"택시타니까 형이 주소 다 불러주던데요. 비밀번호는 생일이고. 그렇게 허술해서 되겠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도둑 한번 안들었... 니가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아?"

"예전에 내 생일때 알려줬잖아요."

"아...그랬나? 아니 그게 언젠데 지금껏 그걸 기억하고."

윤우의 입에서 어쩔 수 없는 웃음이 흘렀다. 은호가 말하기론 7년 전이라는 그 여름, 그 한복판에 은호의 생일파티가 있었다. 딱히 뭘 선물해야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제가 케이크를 사가기로 하고 은탁의 자취방에서 작게 파티를 했다. 너도 생일엔 친구들과 놀아야지 않겠냐- 물었더니 그깟 생일파티 때문에 본가 내려갔다 다시 오기도 귀찮다 했었지.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형이 제 케이크 사줬으니 저도 형 생일 때 보답해야 하겠다는 아이에게 내 생일은 11월 3일이니 그때면 너도 학교 다니느라 바쁘겠고 나도 강의 듣느라 바쁘단다, 하고는 그래도 기특하다고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줬지. 지나가듯 말했던 한 마디를 아이는 내내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다시 건네받은 물컵을 또 한 번에 비우고 길게 한숨을 쉬자 그제서야 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지금 몇 시야?"

"오전 네 시요."

"계속 여기 있었어? 그냥 던져놓고 집에 가지. 잠도 못 잤겠네."

"소파에서 잠깐 눈 붙였어요. 괜찮아요. 형은 좀 어때요?"

"어? 속이 좀 울렁울렁하긴 한데.. 괜찮아. 내일 휴일이고 집에서 좀 쉬지 뭐."

"물 더 줄까요?"

"아냐 됐어. 여기서 더 마시면 그대로 게워낼 걸. 넌 어쩔래? 어디서 살아?"

"형 집 근처에서 자취해요."

"왜 같이 안 살고."

"다 큰 어른끼리 뭘 같이 살아요. 사생활도 있고. 서로 번거로우니까요."

"아아~ 여자친구 있나봐?"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러는 형은, 애인 집에 데려오느라 혼자 살아요?"

"애인은 무슨 애인. 그런 거 안 키워. 난 혼자 살거야!"

만사 귀찮다는 말투로 대답하고 침대에 다시 몸을 던지는 윤우를 보는 은호의 표정이 묘하게 풀어져서 윤우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왜, 형이 우습냐.

"니네 형 집 근처면.. 지금이면 차도 끊겼고 가기 애매할텐데 여기서 자고 가라. 형 침대 넓다."

"안 그래도 침대 넓어서 애인 있는 줄 알았네요. 왜 혼자 살면서 이렇게 넓은 침대를 써요?"

"좁은 침대 답답해서 싫어. 낮에 회사에서 죽어라 시달리는데 잠은 편하게 자야지."

"됐어요. 소파에서 잘게요."

"간다는 소리는 안하네. 그 소파 작아서 거기서 못 자. 키도 큰 애가 무슨 소리야. 형 말 들어라."

너 거기에 꾸겨져서 자게 냅두면 나중에 내가 은탁이한테 혼난다, 너스레를 떨자 그제서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 옷장에서 편한 옷 대강 꺼내 입고, 그 옆에 보면 베개 여분 있으니까 하나 꺼내 와. 화장실 수납장 맨 위 칸에 새 칫솔 있으니까 꺼내 쓰고. 샤워하고 싶으면 해. 그쪽에 새 속옷 있어. 포장 안 뜯은 거니까 그냥 입어. 주섬주섬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는 은호의 뒷모습 잠시 바라보다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윤우는 멍하니 생각했다. 은탁이 녀석, 여기서 지 동생 하룻밤 재운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윤우가 가벼운 연애는 곧 죽어도 못하는 성격인 것도 알고, 내내 실패한 연애담 옆에서 들어주며 같이 술 마셔 준 오래된 사이이니 오해는 안할 테다. 수건으로 머리를 비비며 나왔더니 침대는 비어 있어, 거실을 내다보니 소파 위로 조그만 머리가 빼꼼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옷은 잘 맞아?"

"네."

"다행이네. 들어와-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그래도 주인 없는 침실이라서요. 먼저 들어가 있기는 조금."

"니가 누구 동생인데. 그런 거 신경쓰지 않아도 돼."

안 그럴 것 같게 생겨서는 쭈뼛쭈뼛 조심스럽게 들어온 은호는 윤우가 비워준 침대 한 켠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이불을 들추려다 한숨을 푹 쉬더니, 재차 물어왔다.

"형, 진짜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얼른 누워."

그 소리를 듣더니 잘생긴 눈썹이 약간 아래로 떨어져 시무룩한 강아지 상이 되어, 윤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 타이밍에 시무룩해지는 거야? 하지만 샤워도 했고 따끈하게 익은 몸이 침대 속에 제대로 안착하자 푹 퍼져서, 생각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그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